2025년 월드 시리즈 오브 포커(WSOP)에서 첫 번째로 열린 10만 달러 노리밋 홀덤 하이롤러 이벤트가 지난 금요일 밤 막을 내렸다. 포르투갈 출신의 주앙 비에이라(Joao Vieira)가 103명의 출전자를 제치고 우승하며 총상금 2,649,158달러를 차지했다.
이처럼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상금 규모는 이제 포커 팬들에게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하이롤러 이벤트는 이제 WSOP의 고정 코스처럼 자리잡았으며, 참가비가 수십만 달러에 이르는 이벤트들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2025 WSOP에서는 10만 달러 하이롤러가 두 차례, 25만 달러 슈퍼 하이롤러가 한 차례 열리며, 이 외에도 5만 달러 참가비의 이벤트가 네 차례나 진행된다.
하지만 이러한 고액 참가비 이벤트들이 WSOP에서 흔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렇다면, WSOP 하이롤러 붐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WSOP 하이롤러의 역사
전통적으로 WSOP에서 가장 높은 참가비를 자랑했던 이벤트는 5만 달러 ‘포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PPC)’이었다. 해당 대회는 오랜 기간 동안 가장 권위 있는 타이틀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흐름은 2012년, WSOP가 처음으로 100만 달러 참가비의 ‘빅 원 포 원드롭(The Big One For One Drop)’을 개최하면서 달라졌다. 당시 48명의 선수가 출전했고, 안토니오 에스판디아리(Antonio Esfandiari)는 총상금 1,830만 달러를 거머쥐며 여전히 포커 역사상 최대 우승 상금을 기록 중이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WSOP는 매년 PPC보다 높은 참가비를 가진 하이롤러 이벤트를 꾸준히 개최했다. 이들 이벤트는 모두 자선단체 ‘원드롭’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참가비는 대부분 10만 달러였고, 2014년에는 또 하나의 ‘빅 원 포 원드롭’(100만 달러)이 열리기도 했다. 다만 2012년만큼의 참가자 수는 확보하지 못했다.
저가 이벤트 ‘콜로서스’가 대중화를 이끌었다면, 이들 ‘원드롭’ 이벤트는 하이롤러 시대의 시발점이 됐다. 2018년에는 최초로 원드롭과 무관한 하이롤러 포커 토너먼트 ‘10만 달러 노 리밋 홀덤 하이롤러 대회’가 열렸다. 이 해에는 또 한 차례 100만 달러 빅 원 포 원드롭이 함께 열리면서, 처음으로 PPC보다 비싼 참가비의 이벤트가 두 번 열린 해가 됐다.
2019년에는 다시 10만 달러 하이롤러 한 개로 돌아갔지만, 2021년부터는 원드롭과 관계 없는 하이롤러 이벤트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25만 달러 하이롤러와 10만 달러 하이롤러가 열렸으며, 이후 2022년에는 세 개, 2023년과 2024년에는 각각 두 개씩의 하이롤러가 개최되었다. 2025년 현재에도 세 개의 하이롤러 이벤트가 열리며, 이제는 WSOP에서 여러 개의 6자리 수 참가비 이벤트가 당연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전 세계적으로 커지는 하이롤러 수요
WSOP의 이러한 변화는 전 세계 포커 시장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고액 참가비 이벤트에 대한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고, 이는 전 세계 주요 포커 투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올타임 상금 랭킹은 물가 상승하듯 올라가고 있고, 하이롤러만 전문적으로 출전하는 ‘하이롤러 전업 프로’들도 다수 등장했다. WSOP 역시 이들의 참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고액 이벤트를 꾸준히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포커계에는 전문 프로 선수뿐만 아니라 자산가 아마추어들도 6자리 수 참가비를 기꺼이 지불하며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다수의 이벤트들이 100명 이상 참가자를 기록하며, 하이롤러 시장은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의 주요 포커 투어들은 이들 하이롤러들을 유치하기 위한 유치전에 나서고 있다.
2016년 출범한 ‘트라이튼 포커 투어(Triton Poker Tour)’는 하이롤러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해마다 여러 시리즈를 통해 고액 이벤트를 개최하며, 2025년 현재는 거의 모든 시리즈에서 참가자 및 상금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포커고 투어(PGT)’ 또한 라스베이거스를 중심으로 고액 하이롤러 일정을 정기적으로 운영하며, 연중 내내 대형 상금을 노리는 선수들의 메카로 자리잡았다. 아리아 카지노 등 라스베이거스 내 주요 포커룸들도 정기적으로 하이롤러 게임을 개최하고 있다.
유럽 시장도 뒤처지지 않았다. ‘유러피언 포커 투어(EPT)’는 최근 몇 년간 10만 달러 이상의 슈퍼 하이롤러 이벤트 개최 횟수를 늘리며, 유럽 내 하이롤러 수요 증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한때 온라인 포커 사이트의 성장과 불법 사이트의 확산은 오프라인 카지노 수익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온라인에서 포커에 입문한 수많은 유저들이 실력을 키워 라이브 대회에 도전하면서, 오히려 오프라인 하이롤러 시장은 더 커지고 다양화되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시너지가 하이롤러 시대를 더욱 굳건히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이롤러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 콘텐츠’
이제 WSOP의 하이롤러 이벤트는 단순한 특별 대회가 아니라, 해마다 기대되는 주요 콘텐츠가 됐다. 포커계의 자본력과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10만 달러 이상 참가비를 지불하는 플레이어 풀도 넓어지고 있다.
WSOP를 비롯한 전 세계 주요 투어들이 이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하이롤러의 시대가 단지 ‘유행’이 아닌, 현재 포커 시장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국내에서도 확산되는 하이롤러 열풍
글로벌 포커 산업에서 하이롤러 대회가 일반화되는 추세에 발맞춰, 국내에서도 이러한 고액 포커 이벤트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온라인 포커 플랫폼의 성장과 외국인 관광객 중심의 카지노 산업 변화가 맞물리며, 한국 시장도 하이롤러 문화에 서서히 영향을 받고 있다.
온라인 포커 플랫폼의 보급과 국제 대회의 온라인 중계는 국내에서도 포커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진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온라인 포커 사이트에서는 수백만 달러 상금이 걸린 토너먼트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한국인 참가자도 종종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일부 온라인 사이트는 하이롤러 유저를 위한 고액 스테이크 테이블을 상시 운영하며, 상금 규모와 참가자 실력이 해마다 고도화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포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국내 포커 팬층의 저변 확대를 이끌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포커에 대한 사행성 논란이 존재하고, 하이롤러 이벤트 개최에는 법적 제약이 따르지만, 최근 들어 소셜 포커 앱이나 포인트 기반의 합법적 온라인 포커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제도적 기반 마련을 위한 논의도 활기를 띠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유흥이 아닌 전략 게임, 스포츠의 일환으로 포커를 바라보는 시각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된다.
장기적으로는 포커를 중심으로 한 e스포츠 대회나 국제 대회의 국내 유치 가능성도 열려 있다. 하이롤러 문화가 단순한 고액 베팅을 넘어서, 고급 관광·전략 스포츠·글로벌 마케팅이 결합된 새로운 산업 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